Book Review
나쁜 뉴스의 나라
순수하게 아무 의도도 손익계산도 없는 기사라는게 현 시점에서 있을 수 있나라는 의문은
예전부터 해 왔고 딱히 신선한 내용은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주요언론을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필요한 내용이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이런 건 또 안 읽겠지. 아이러니)
기레기들은 상상이상으로 웃기다는것.
주요언론에 광고를 주지 않으면 될 텐데, 왜 주는가 하는 의문에
"정부나 기업이 언론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쓰는 돈이 광고 집행비"라는데,
뫼비우스의 띠처럼 악순환이 아닌가.
한번 끊어내면 고름이야 터질 지언정 좀 더 본연의 언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일텐데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라 상부상조가 필요한가 보지.
덧. 2016년도 발행된 내용이라 연식이 된 예시들이 나오긴 하지만 오늘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고
딱히 발전된 모습도 없으므로 읽는데는 무리가 없음.
보수의 언어는 깔끔하다. 불법 점거, 이 한마디면 된다. 실제 조선일보는 이런 언어로 사안을 설명했다.
반면에 진보의 언어는 복잡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점거 농성을 하는 상황이 왜 불법이 아닌 합버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왜 이들이 불법을 각오하고라도 점거를 할 수 밖에 없는지 또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흔히 명시적인 힘에 집중돼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남을 강제하는 ‘명시적’ 권력은 눈에 잘 띄는 힘이다. 언론도 이런 명시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이슈를 의제로 설정하고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사안을 인식하도록 보도하는 힘이다. 반대로 ‘묵시적’ 권력도 있다. 바로 침묵의 힘이다. 이는 사회 지배 계층에게 불리한 이슈는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라 부른다.
언론과 미디어는 청년들을 다루면서 ‘불쌍한 청년’ 혹은 ‘위대한 청년’이라는 극단적인 대립 항을 만들었다. 진보 언론에서는 주로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노동문제의 틀과 88만원세대를 결합해 착취당하는 청년들의 일상을 폭로했다. ‘열정 페이’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반면에 보수 언론은 주로 성공한 젊은 CEO의 사례를 다루며 G20세대, 실크세대의 면모에 집중했다. 이 둘의 대립 사이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힐링 담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언론은 N포세대론과 수저계급론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일보는 2015년 2월 ‘달관세대’라는 신조어를 또 만들어 냈다. 2009년에는 88만원세대에 맞서 도전적인 청년들을 부각하던 조선일보가 2015년에는 N포세대가 취하고 있는 ‘포기’를 ‘달관’으로 뒤틀었다.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며 안분지족한다는 뜻을 지닌 일본의 ‘사토리さとり세대’를 한국화한 신조어다.어느 날 갑자기 언론에 신조어가 등장하고, 한꺼번에 특정 주제의 기사가 수십 개씩 쏟아진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기사만 꼼꼼히 읽어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언론과 미디어가 팩트만 전달할 것이라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다.